박승호(2004-03-19 21:02:06, Hit : 3950, Vote : 724
 흑치상지 (黑齒常之 ; ?~?)

220.흑치상지 (黑齒常之 ; ?~?)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달솔 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으로서 임존성(任存城:大興)을 근거로 패잔병 3만여 명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반격을 개시,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어 200여 성을 수복, 군세를 떨쳤다. 이에 위험을 느낀 소정방은 9월초 의자왕과 귀족들을 끌고 장안으로 철수했다. 그 후 백제군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것) 나당연합군이 총공격을 해오자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되었으며, 백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를 받고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 임종성 공략 때 당나라 군사에 끼어 참전, 이를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佯州刺史)가 되고, 678년(당 의봉 3) 토번(吐蕃) 정벌에, 681년(당 개요 1) 토번의 잔도(殘徒) 찬파(贊婆) 토벌에 참가, 그 후 돌궐(突厥)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를 거쳐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받고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주홍(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의 역모사건 때 옥사했다. 즉, 장안으로 옮겨간 흑치상지는 664년 웅진도독부의 웅진성 성주로 백제 땅을 다시 밟았으나, 672년 신라의 공격으로 웅진도독부가 완전 해체되면서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당으로 돌아간 그는 양주자사가 되어 678년 토번(티벳)을 정벌전에 나섰다. 당군은 토 번군의 용맹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하였으나 오직 흑치상지만이 결사대 5백을 이끌고 토번군을 무너뜨렸고 이후 계속된 토벌전에서 기마대를 이용하여 번번히 토번을 제압하였다. 이어 돌궐 제국을 제압하고 서경업의 난을 평정하여 당의 중앙아시아 지배를 확고하게 하였으며 이런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연국공의 작위와 식읍 3천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제국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죽음이 다가왔다. 687년 돌궐 정벌에 나섰던 그는 동료장수였던 찬보벽의 패전으로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게다가 간신 주흥이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조회절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주홍에게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689년 10월 9일(양력 11월 26일)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60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9년 뒤 장남 흑치준(黑齒俊)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신원을 신청하였고 측천무후로부터 좌옥검위대장군으로 추증받아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1년 뒤 측천무후의 조칙으로 그의 유해는 왕족과 귀족들만이 묻히는 북망산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죽은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검교좌우림위 상주국(檢校左羽林衛 上柱國) 연국공(燕國公)흑치상지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지체있는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군사일을 많이 경험하였다. 장수로서 군대일을 총괄하게 되어 비로서 공적을 펴게 되었다. 옛날에 뜬소문을 받아가지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윽한 분함을 머금고 목숨을 바쳤으니 의심스러운 죄가 분간이 되지 않았도다. 근래에 조사를 해보니까 일찍이 반대되는 상황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허물이 아닌 것 같다. 진실로 깊이 민망스러우니 마땅히 원통함을 풀어주어서 무덤에 가 있는 혼이라도 위로해 주어야겠다.  그래서 총장을 더해서 무덤을 빛나게 해주어야겠다고 하여 좌옥금위대장군(左玉錦衛大將軍)에 추종하고 훈봉을 주었다.  






흥경성전투(興京城戰鬪)
흑창=환곡제도(還穀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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