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2004-03-19 21:02:50, Hit : 3275, Vote : 727
 흥덕왕(興德王, ? ~ 836)

224.흥덕왕(興德王, ? ~ 836)
신라 제42대 왕(재위 826~836). 성 김(金). 이름 경휘(景徽). 초명 수종(秀宗) ․수승(秀昇). 원성왕의 손자이며 헌덕왕의 동생으로, 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김씨(金氏). 819년(헌덕왕 11) 이찬(伊)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822년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갔다.즉위하자 당(唐)나라에 사신을 파견, 당 문종(文宗)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고, 828년(흥덕왕 3) 대아찬(大阿) 김우징(金祐徵)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이 해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서 재배, 이때부터 차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다. 834년 복색제도(服色制度)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였다. 유언에 따라 경주시 안강읍 북쪽에 있는 장화부인, 즉 정목왕후(定穆王后)의 능에 합장되었다.
* 흥덕왕릉 (興德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六通里)에 있는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능.1963년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6만 1983㎡, 영조(營造)는 835년경이다.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적 왕릉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비와 합장한 것으로 되어 있어, 봉분(封墳)의 규모가 비교적 크다. 봉분 밑에는 판석(板石)을 세워 둘레돌[護石]을 삼고, 판석과 판석 사이에 탱주(伸)를 세워 판석을 고정하였으며, 위에 갑석(甲石)을 얹었고 탱석에 각각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둘레돌의 주변에 방사형으로 박석을 깔고, 그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난간 기둥에는 상․하 2개의 둥근 구멍을 뚫어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봉분 4귀퉁이에는 각각 돌사자 1구씩을 배치하였고, 그 전방의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각 1쌍이 배치되었다. 또, 능 전방의 왼쪽에는 능비를 세웠던 귀부(龜趺)가 있으나 손상되었고, 비신(碑身)과 이수(首)는 망실되었다. 이 표식물(表飾物)의 양식을 보면 봉분 밑의 둘레돌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원성왕릉의 형식을 따랐고, 돌사자의 배치는 성덕왕릉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문인석 ․무인석의 배치는 성덕왕릉 또는 원성왕릉의 형식과 같다.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었는데,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하며, 능의 주변에서 ꡐ興德ꡑ이라 새겨진 비석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흥사단(興士團)
흥보가= 흥부전(興夫傳)의 박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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