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2004-03-19 20:51:16, Hit : 3785, Vote : 975
 환국

175.환국
경신환국 (庚申換局)
1680년(숙종 6)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하였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남인끼리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권력을 장악한 남인 세력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경신년인 1680년 3월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許積)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許潛)을 위한 연시연(延諡宴: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이 때 이번 연회에 병판(兵判) 김석주(金錫冑),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를 독주로 죽일 것이요, 허적의 서자(庶子) 견(堅)은 무사를 매복시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김만기만 참석하였다.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 ․신여철(申汝哲) 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鐵原)에 귀양갔던 김수항(金壽恒)을 불러 영의정을 삼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의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ㅊ음달인 4월 정원로(鄭元老)의 고변(告變)으로 허견(許堅)의 역모가 적발되었다. 이른바 ꡐ삼복의 변[三福之變]ꡑ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ꡒ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西人)들이 임성군(臨城君)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兵力)으로 뒷받침하겠소ꡓ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 ․복창군 ․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惡子)를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갑술환국 (甲戌換局)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폐비민씨복위문제를 계기로 남인 실권, 소론과 노론 재집권,희빈장씨 및 남인 처벌, 소론과 노론 요직에 등용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 당시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남인은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권했는데, 이때 그들은 민씨 폐출(廢黜)의 원인이 된 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의 원자정호(元子定號)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런 판국에 만일 민씨가 복위하여 다시 왕비가 되면 남인은 또 실권하게 되므로 민씨를 지지하는 김춘택 등을 몰아내려 한 것이다.
처음에 숙종은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禧嬪:희빈장씨)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으나,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뉘우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종은 도리어 민암의 처사를 미워하고 김춘택 등의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민암을 사사(賜死)하고 그의 일당인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을 유배하였으며, 동시에 민씨를 지지했던 소론의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한편,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고 그때 민씨를 지지하여 2번이나 상소를 올렸다가 사사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하여 김수항(金壽恒) 등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이 옥사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대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소론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는 노 ․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기사환국 (己巳換局)
1680년(숙종 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숙종의 계비(繼妃) 민씨(閔氏)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후궁인 숙원 장씨(淑媛張氏)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겼는데, 조정에서는 이 일을 중요시하여 궁중의 내사(內事)까지 논간(論諫)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을 낳았다. 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숙종대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政局)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화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金壽興) ․김수항(金壽恒)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여성제(呂聖齊) 등의 남인이 득세하였다. 이 환국(換局)의 여파로 민비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
정미환국(丁未換局)
1727년(영조 3)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정국(政局)의 인사를 개편한 일. 영조는 영단을 내려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하게 시행함으로써 노론(老論) ․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사람은 제거시키고자 하였다. 때마침 노론의 이의연(李義淵)이 상소하여 물의를 일으키자 영조는 과감하게 그를 유배시켰으며, 아울러 소론 중에서 당파성이 농후한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도 국문 결과 상소를 허위 날조한 사실이 밝혀져 처형하고 같은 파의 이광좌(李光佐) 등도 유배시켰다. 한편 노론의 정호(鄭浩) ․민진원(閔鎭遠) 등을 기용하고 ꡐ신임(辛壬)의 옥(獄)ꡑ에 희생된 김창집(金昌集) 등의 관작을 추복, 원혼을 위로해 주었다. 이리하여 노론이 주요한 직책을 차지한 결과가 되었으나 영조의 뜻은 본래 노 ․소 양파의 당쟁을 조정하는 데 있었으므로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趙泰億) 등도 기용하였다.





활구(闊口)=은병(銀甁)
환(換, ex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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