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호(2004-03-19 20:52:14, Hit : 5033, Vote : 1031
 활인서(活人署, 活人院)

178.활인서(活人署, 活人院)  
활인서는 도성의 환자를 구활(救活)하던 기관으로서 태조조에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2개 기관을 설치한데서 비롯된다. 태종 14년(1414) 9월에 이를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이라 하였고, 세종 13년(1467)에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로 개칭하였으며, 중기 이후에는 유명무실하여졌다. 그러다가 영조조에 이를 부흥시켜 본래의 업무수행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그 관원은 각각 별제(別提, 종6품) ․ 참봉(參奉),(종9품) 등이 있었으며, 동활인서는 제생원(濟生院), 그리고 서활인서는 혜민서(惠民署)가 나누어 구료케 하였다.
위 2개의 활인서 중 동활인서의 위치는 현 서울 성북구 돈암동이었으며, 서활인서의 위치는 현 서울 마포구 아현동이었다. 그런데 동활인서의 위치가 도성도(都城圖, 영조대 작성)에는 돈암동으로 나타나 있으나, 뒤에 만들어 진 수선도(首善圖)에는 신당동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영조조 이후에 이곳으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한양부 동부 연희방(東部燕喜坊)에 있던 동활인원(東活人院)과 용산(龍山)에 있던 서활인원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이다. 고려시대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계승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와 의식(衣食) 제공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1466년(세조 12)에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로 개칭하였으며, 관원으로는 제조(提調) 1명, 별제(別提) 4명, 참봉 2명이 있었다. 일반 의료 활동 이외에도 무의탁환자를 수용하였으며,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환자를 격리 수용하여 간호하고 음식과 옷, 약 등을 지급하였다. 또한 사망자가 있을 때에는 매장까지 담당하였다. 1709년(숙종 35)에 혜민서(惠民署)로 이속되었으며, 1743년(영조 19)에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혜민서는 처음에 혜민국(惠民局)이라고 했으며, 한양부 내의 서민환자를 치료하던 서민의 병원이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활구(闊口)=은병(銀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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